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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워크에 대한 단상

크고 작은 헝겊 조각을 덧대어 큰 헝겊을 만드는 수예 기법을 패치워크라고 합니다. 과거 주로 이불을 만들 때 쓰였다는 이 기법은 색색의 헝겊 조각을 이어 붙인 모습의 큰 헝겊을 만들죠. 때문에 패치워크는 미봉책으로 수습하는 일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비디오 게임 특히 PC 게임에서 중대한 결함을 보완하거나 게임을 더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패치 파일을 만들어 게임을 고치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프로들이 최선을 다해 만드는 게임도 결국은 패치로 누덕누덕 기우는 패치워크를 하는 거죠. 그리고 이런 패치워크에 대해 소비자는 낮은 완성도의 게임 발매에 대한 짜증을 내기보다는 성의 있는 사후관리와 장인정신을 높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색색의 헝겊 조각을 꿰어 만드는 이불이 예쁠 수도 있듯 패치워크가 꼭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여기 패치워크라는 2인용 보드게임이 있습니다. 이 게임은 패치워크로 점철되는 우리의 인생에 대한 심오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 게임은 패치워크 이불을 누가 더 잘 만드는지 겨루는 게임입니다. 이불의 색 배합 따위는 중요치 않고 얼마나 큰 이불을 만드느냐가 점수의 기준. 9X9 크기의 게임판에 빈칸 1칸당 감점 2점. 인생에서 우리는 선행도 하고 악행도 하고 이타적인 일도 하고 이기적인 일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덕지덕지 붙은 것이 우리의 인생, 뭘 하든 후회없이 많이 하라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단추는 게임에서 헝겊 조각을 사기 위한 돈 역할을 하면서 게임이 끝나면 1점으로도 계산됩니다. 이것은 살아 생전의 재물을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죠. 슬프게도 우리의 인생 최종 평가에도 재물은 일정한 영향을 미칩니다. 게임 중 우리는 재물의 의미를 과대평가하기 마련입니다. 게임 중간 과정에 제법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하지만 게임이 끝나고 남은 재물에 대한 평가는 고작 1점입니다. 개인판의 빈칸은 칸 당 감점 2점이고요. 1칸을 메우는 것과 단추 1개를 버는 것의 효율은 전자가 2배나 뛰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게임 중 이 중요한 사실을 종종 잊습니다.

인생엔 노력과 함께 운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이 게임에서 턴마다 선택할 수 있는 헝겊 조각은 항상 셋 중 하나로 주어집니다. 재물이 풍족하여 충분히 쓰고 싶어도 선택할 수 없는 조각이 있고, 정말 좋은 조각인데 재물이 부족해 선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보통은 투입되는 재물이나 시간 대비 효율이 얼마나 좋은지를 기준으로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게임이 끝나봐야 알 수 있습니다.

재물이 지속적으로 들어와야 중요한 시기에서 좋은 조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물을 늘릴 기회를 주는 조각들은 대개 비싸거나 시간을 많이 요구합니다. 교육 같은 일은 지금 당장은 큰 의미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좋은 일이겠죠. 매 턴 주어지는 3개의 선택은 여러 가지를 의미합니다. 교육에 대한 투자, 탈선, 이직, 단기 아르바이트, 보드게임 커뮤니티 폐인되기 등등.

게임 중 재물을 얻을 기회가 생기는데 초반에는 정말 첫 월급처럼 쥐꼬리만한 보상을 얻습니다. 그리고 중간 과정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나중에는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회도 생깁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신기하게도 재물에서 일방적으로 밀린 사람도 저렴하고 넓은 조각을 선택하는 전략이 가능하며 약간의 재물 차이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빨리 행동하는 사람은 게임에서 빈 칸을 메울 수 있는 기회로 보상을 얻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행동하는 사람에겐 좀 더 넓게 관망하고 인생의 전략을 세울 시간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60칸 남짓이며 게임이기에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공평합니다.

패치워크는 게임입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재물로 시작하고 금수저 인생도 흙수저 인생도 없습니다. 게임의 가장 큰 장점은 실패하더라도 게임에서 지는 것 이상의 불이익이 없고 뭐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죠. 과감한 인생을 던져보세요. 게임이 끝난 뒤 완성된 이불은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줄 겁니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패치워크 게임과 함께 밤새도록 시와 사랑 그리고 인생을 이야기합시다.

방주에 탈 동물들 (Animals on Board)

















다양한 민족의 창세 신화에는 대홍수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저는 "대홍수가 실제로 있었다는 증거" 정도로 생각했는데...
좀 더 커서 생각하니 최초에 잘 만든 창세 신화를 가진 민족이 있었고
다른 민족들이 그걸 모방해서 창세 신화를 만들다보니 생긴 일 정도로 보게 됐습니다.

어쨌든 플레이어는 대홍수 신화의 주인공으로 대홍수 위에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방주에 동물을 태웁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다른 민족 창세 신화의 선지자 쯤 되겠죠..

말하자면 방주에 태울 동물 10마리를 모으는 게임인데요..
총 12종의 동물이 있고 각 동물은 5마리씩 준비되어 있으며
1부터 5까지 점수가 적혀 있습니다..

1마리를 모으면 1~5점 (타일 점수)
2마리를 모으면 0점
3마리 이상 모으면 숫자랑 상관 없이 각 타일의 점수 5점

그러니 전략은 다양한 동물의 숫자가 4~5인 타일을 모으는 것.. 과
집중할 동물 2종 정도를 골라서 3마리 이상 모으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3마리를 모으려면 그 과정에서 2마리를 모아야 하고..
3번째 동물을 못 먹고 끝나면 0점이니 골치가 아픕니다...

게임의 메인 시스템은 줄로레또 비슷해서
자기 차례가 되면 판을 세팅하거나
세팅된 한 덩이를 가져오는 선택을 합니다..
동물을 모으는 것도 비슷하군요.. 한 동물을 많이 먹으면 좋은 것도 비슷하고

런데 이 세상 대부분의 것은 후대의 것이 선대의 것보다 나은지라
이 게임이 좀 더 세련미가 있어요.. 설명도 더 쉽고...
경험상 점수 알려주고 메인 시스템 알려주면 그 뒤는 다들 알아서 잘 하더라고요..

2016년 출시작 가운데 가장 맘에 듭니다...
누가 무슨 약을 빨고 이렇게 멋진 게임을 만들었나 하고 확인하니
핀카를 만든 작가들의 작품이네요... 그럼 그렇지..


로스트 시티 (Lost Cities)




보드게임 입문 초기에 2인용 게임 명작이라는 얘기 듣고 샀다가 별로 저와 안맞아서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게임입니다. 지금은 명작 인정.

일단 게임은 거창하게도 세계의 고대유적 5개에 탐험대를 보내고 고대 문명의 신비를 밝힌다는 신나는 테마를 다루고 있으나 신나는 모험은 개뿔... 1장 내고 1장 가져가며 진행하는 카드 게임일 뿐이며 카드의 정보도 2~10의 숫자와 5가지 색깔 뿐입니다.

카드는 각자의 앞에 놓게 되는데, 각 색깔마다 점점 숫자가 커지게 놓아야 합니다. 흰색 2를 놓은 뒤 흰색 6을 놓는 건 가능하지만 그 반대는 안된다는 거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각자의 앞에 낸 카드가 일단 점수이기는 하지만 각 색깔마다 카드 1장이라도 낸 곳은 20점씩 빼고 계산한다는 겁니다.

일단 스토리는 이런 겁니다.. 흰색 카드를 내는 곳은 설원 속에 가려진 고대 유적인데, 탐사를 개시하는 순간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탐험 비용을 마련하기 때문에 20만큼 빚을 지고 시작하고, 카드 숫자가 유물 탐사해서 번 돈 정도 되는 겁니다... 그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카드 1장도 안 낸 색깔은 20점 안 까는 거냐? 맞습니다.

말하자면 게임 끝날 때까지 합계 20 이상 놓을 자신이 있는 색을 정해서 집중투자하는 선택과 집중의 게임입니다. 모든 색깔 다 먹으려 애쓰면 오히려 총점이 줄어들거나 마이너스 통장 개설을 하게 될 겁니다.

처음에는 오름차순으로 카드를 낼 수 있는 드로우 운빨이 게임의 모든 것인줄 알았으나 점점 선택과 집중의 묘미와 함께, 상대의 감점을 유도하는 심리전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마음 속의 평가가 점점 올라... 지금은 우주 명작이라 생각합니다..

소시적 화투놀이 좀 하셨던 분은 점수 계산할 때 569, 389, 479 같은 더해서 20 나오는 조합에 대한 식견을 활용하여 더 빠르고 운치있는 점수 계산도 가능합니다.

와이어트 어프(Wyatt Earp)


















이 게임 해본 지가 어언 15년... 

처음 이 게임을 할 때, 상업적 게임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게임 자체는 고전 게임 러미의 변형인데, 현대적 감각의 양념도 꽤 많이 들어 있습니다. 가장 독특한 부분은 득점 방식, 보통 러미는 세트 만들어서 버리고 손 터는 것이 목적입니다만 여기서는 버리는 대신 자기 앞에 카드를 깔고 이게 득점으로 이어집니다. 점수 계산은 마치 주식을 다루는 게임에서 배당금 정하는 방식을 연상시켜요. 눈치 작전이 살 떨리죠. 

악명 높은 실존 무법자들과 실존 보안광 와이어트 어프가 그럴 듯한 카드 일러스트로 재현되어 있고, 카드 일러스트가 서부 개척 시대 신문을 오려낸 듯한 느낌을 줘서 몰입감도 상당해요. 
테마, 일러스트, 규칙, 밸런스 등 여러 모로 완성도 높아요. 특히 이 게임은 3인 게임일 때 기묘하게 더 재미있습니다. 모든 종목에서 물고 물리는 2위 쟁탈전을 경험할 수 있고, 게임 끝나는 타이밍이 절묘해서 다들 숨겨둔 승부수가 나올까 말까한 타이밍에 딱 끝나요.

Gwent (궨트)
























2015년을 빛낸 갓 게임 위쳐3

저도 꽤나 빠져든 게임입니다. .
정신 차리고 보니 고가 그래픽 카드를 장만했고, 위쳐3 시즌 패스도 바로 질렀으며, 국내 출판된 위쳐 소설을 다 사버렸고, 언제 하게될지 기약없지만 위쳐 1편 2편도 질렀습니다...

위쳐3에는 빠져들만한 것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미니게임 궨트입니다.

궨트는 위쳐 세계의 매직 더 개더링이라 할 수 있는데 놀랍게도 귀족들까지 빠져서 하는 게임으로 묘사되죠. 주인공 게롤트는 게임 극 초반에 허술한 궨트 카드 덱 하나를 얻고, 이후 강자들에게 도전하여 승리하거나 퀘스트에 성공한 보상으로 카드를 얻어서 카드 풀을 늘리고 좋은 카드로 덱을 개비해 나갑니다. 후반에는 좋은 궨트 덱이 있어야 해결 가능한 퀘스트도 나와요. 물론 메인 퀘스트가 아니니까 무시해도 되긴 하지만.

궨트는 보드게임이나 TCG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쉬운 게임이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에게는 1도 이해안되는 지루한 이벤트입니다. 그러다보니 궨트에 빠져서 덱을 만들면서 진행하는 사람은 덱이 점점 강해지고 퀘스트도 무난히 넘기지만, 초반에 궨트 무시하고 달린 분들은 끝까지 외면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궨트를 게임의 부 목적 정도로 여겼고, 결국 전 세계를 돌며 모든 카드 올 콜렉트를 해냈습니다. 그렇게 빠져서 한 게임이다보니 실물 궨트 카드를 갖고 싶어서 인터넷에서 이미지 오려서 한국어 궨트 자료를 만들고 그랬는데 자료 제작이 다 끝날 때쯤, 위쳐 확장판이 발매되는데 확장판 박스셋에는 실물 궨트 카드가 포함된다는 말도 안되는 뉴스가...

시즌 패스 구입자로서 갈등은 되었으나 궨트 실물 카드를 위해 확장판 박스셋도 지르게 되었습니다. 얄밉게도 위쳐 3는 확장판 2개가 발매됐는데 각 확장판에 덱 2개씩 들어 있어서 확장판 2개의 박스셋을 모두 질러야 덱 4개 풀셋이 완성됩니다. 하지만 지를 수 밖에 없더군요.

궨트는 최소 22장의 카드로 구성된 덱을 갖고 하는 게임입니다. 게임 시작 때 이 중 10장을 드로우하고 이걸로 3판 2승 게임을 치르게 됩니다. 중간 드로우 기회가 없지는 않으나 제한된 편이고 이 10장을 각 라운드에 몇 장 사용할지가 게임의 관건입니다. 나의 강력한 카드를 가능한 쓰지 않고 이기거나, 질 때 지더라도 상대의 중요 카드를 다 끌어내서 다음 라운드를 도모하는 것이 게임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으며 대단한 깊이의 게임은 아니어도 심리전 기반의 묘미있는 게임인 것은 분명합니다.

북부 왕국, 닐프가드, 스코이아텔, 괴물의 4개 덱에는 특징적인 키워드가 있어서 약간씩 전략이 다릅니다만 북부왕국과 닐프가드가 비교적 강하고 괴물은 운을 많이 타며 스코이아텔은 한층 깊은 사고를 필요로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확장판에 일부 카드가 추가되어 스코이아 텔 밸런스가 조금 나아짐.) 그냥 북부 왕국을 하세요.



우연인지 실제로 참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궨트의 카드 대결은 콘도티에르 보드게임과 매우 유사합니다. 카드 전투력을 2배로 만들어주는 군악대 카드나, 카드 전투력을 1로 바꿔주는 눈보라 카드, 군악대나 눈보라의 영향을 받지 않는 히로인 카드 같은 것이 궨트에도 나오거든요. 혹시 궨트에 감동하신 분이라면 콘도티에르 보드게임 하나 지르는 것도 좋겠습니다.

콘도티에르는 두 번 나온 바 있는데 왼쪽의 유로 게임즈 버전이 옛날 버전, 오른쪽의 판타지 플라이트 버전이 최근 버전입니다. 판타지 플라이트 버전이 딱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데 옛스러운 그림 때문에 보통 구버전이 선호되죠. 저는 구 버전 소장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돌아올 수 없는 친구 줘 버리고 신 버전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패치워크

옷 조각을 모아서 큰 이불을 완성하는 게임입니다. 각 조각에는 이것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과 이것을 얻을 때 흘러가는 시간이 표시돼 있어요. 그래서 주어진 시간을 다 쓰면 게임이 끝납니다. 게임에서 이불 조각을 얻기 위해 쓰는 자원은 단추인데 게임 중 벌어들일 수도 있고 남은 단추는 점수가 돼요. 각자에게는 채워야 할 9X9칸의 필드가 있고 여기를 가능한 꽉 채우는 것이 일단의 게임의 목적입니다. 못 채운 1칸당 2점의 벌점.

조각은 다양한 패러미터를 갖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턴마다 3개의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하며 진행하게 됩니다. 모든 조각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싸고 좋은 조각 따위는 없어요.

시간: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조각을 계속 집으면 결과적으로 턴 수가 줄어듭니다. ㅜㅠ

면적: 일단 타일 조각 1칸은 2점의 점수 가치가 있으므로 타일의 면적은 가격 대 성능비를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비용이 싸면서 면적이 넓은 조각은 보통 모양이 거칠어서 끼워 넣기 어렵죠.

생산성: 일부 조각에는 단추 그림이 있는데, 게임에서 일정 시간이 지날 때마다 그 그림만큼 단추를 추가로 지급받습니다. 생산성이 높은 조각은 비싸기 마련입니다. 게임 초반에 생산성이 높은 조각을 얻는다면 게임은 거의 이긴 셈.

두 플레이어는 사용한 시간을 트랙에 각자의 말로 표시하며 항상 차례는 더 많은 시간이 남은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따라서 턴은 꼭 교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연속 턴을 할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생겨요. 다음 턴 상대의 움직임 정도는 예측할 수 있어서 재미집니다.
완벽하지 않은 조각들을 선택하고 이어 붙여서 큰 이불을 만드는 것은 제 삶의 궤적 같아서 참 마음에 듭니다. 100년도 못 살 나의 시간, 제가 뒈질 때 제 이불의 크기는 얼마나 될는지.

애니그마



보드게임이 가지는 가장 큰 기능이 "이거 하면 재미있어요" 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효용을 기대하는 소비자는 많으며 경험으로는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이거 하면 공간 지각력 좋아져요" "이거 하면 연산 연습 되요" 이런 거 말이죠. 그러다보니 각 보드게임의 활용 영역을 교과와 연관하는 시도도 많고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시장 또한 작지 않아요.

국내에서 이 방면으로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는 우봉고를 꼽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방학 때 하는 초등학생 대상 우봉고 대회 참가자가 1000명에 달할 정도이고, 최상위 우봉고 플레이어들의 정답 외운 문제 푸는 듯한 번개같은 퍼즐풀이에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어쨌든 그 뒤로 우봉고의 뒤를 이을 작품이 여러 번 거론되었습니다...
잭 앤 팩 이라는 이사 트럭 나오는 게임은 꽤 괜찮았는데 시기가 좀 안 맞았고, 우봉고의 데스 레이블같은 작품 우봉고 익스트림은 너무 어려워서 큰 재미 못 봤어요. 논리퍼즐 울루루는 충분히 가능성 있어 보였으나 역시 큰 재미 못 봤고, 2인 1조 입체도형 쌀기 라 보카도 기대보다는 별로인 상태, 그 외에 몬도나 갤럭시 트러커, 팩토리펀 같은 작품도 거론은 되지만 초등학생 대상으로는 아무래도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에니그마도 그런 게임입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4가지 장르의 퍼즐이 등장하고 각자 다른 장르의 퍼즐을 빨리 풀기 위해 경쟁한다는 점 정도일 겁니다. 파이프 연결, 평면 도형, 입체 도형, 연산 등 4가지 장르의 퍼즐이 준비되어 있고 서로 다른 영역의 속도 경쟁이 벌어져요.

하다보면 어떤 사람은 특정 장르에 강하고 특정 장르에 쥐약인 반면, 어떤 사람은 전 장르를 고르게 잘 소화하는 식으로 개인차가 나타납니다. 또 퍼즐을 푼 뒤에 받은 타일로 점수를 만드는 과정이 일종의 퍼즐인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

또 저 점수 계산 시스템 때문에
"난 입체 도형 장르는 쥐약이지만 가장 많은 점수가 기대되는 타일을 얻기 위해 입체 도형에 도전해야 해"
같은 상황이 일어나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일단 우봉고와 비슷하고 조금 더 수준 있는 게임을 찾는다면 이 작품이 딱이라 생각합니다.

Splendor (스플렌더)


스페이스 카우보이라는 덜 알려진 회사의 최근 작품입니다. 이 회사는 프랑스의 대표 유통사 아스모디 에디션의 CEO가 독립하여 세운 회사입니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 만들고, 내가 팔고 싶은 게임 팔겠다" 라는 선언이 아닐까 싶어요. 

게임 내용물은 비교적 단촐합니다. 그런데 과도하게 묵직하고 손맛 좋은 토큰이 들어 있습니다. 저걸 지폐나 값싼 내용물로 대체하면 소비자 가격을 크게 줄일 수 있겠지만 인디 정신 같은 것이 느껴지는 회사라 이런 결과물이 나왔을 거라고 변호해 봅니다. 

게임은 자원을 가져오거나 자원을 내고 카드를 사는 것을 반복하는 내용입니다. 구입한 카드는 영구적인 자원이 됩니다. 따라서 점점 자원이 늘고 발전하여 더 비싸고 좋은 카드를 지를 수 있는 토대가 되며 비싼 카드에는 다량의 승점이 매겨져 있습니다. 

착실히 싼 카드를 모으면 비싼 카드도 사실상 공짜로 구입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만 이 게임은 먼저 15점을 내면 이기는 게임이라 그 전에 득점 카드를 사며 치고 올라가는 플레이어가 승리하기 마련입니다. 

성장 동력을 만들고, 적당한 타이밍에 치고 나가며, 때로는 싸게 살 수 있다면 싸게 사는 것이 좋지만 어느 시점 부터는 싸게 살 수 있다고 무조건 사기보다는 계획을 세워서 턴 낭비를 줄여야 하고, 승부처에 운도 따라줘야 해서 여러 모로 진땀 나는 게임입니다. 

그런 반면 초보자들이 쉽게 적응하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게임을 보드게임 미경험자들과 자주 플레이 했는데 2회 정도 플레이하면 제 알량한 경험 우위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없더군요. 현역 여대생, 자영업자, 미술 종사자 등 다양한 분들에게 밟혀보았습니다. 

구 작품 중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분위기가 유사하며 그 작품 좋아하는 분들은 거의 무조건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하리라 생각합니다. 분위기나 테마 몰입은 상트 쪽이 나은데 밸런스나 후반 긴장감은 확실히 스플렌더가 나아요. 

2인플보다는 3인 이상 플레이를 좀 더 권장합니다. 2인플은 약간 마음 상할 수 있어요. 물론 커플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플레이해서 커플리 깨지고 저에게도 연애의 기회가 돌아온다면 그건 감사합니다. 

안드로이드 넷 러너



넷 러너는 전설적인 작가 리차드 가필드의 1996년 작품이며 리차드 가필드가 스스로 자신의 최고 작품으로 꼽는 작품입니다. 뇌에 해킹장비를 연결하여 서버 안에서 활동한다는 혁신적인 게임 테마와 독창적이고 테마를 잘 살려내는 게임 구성으로 인기몰이를 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작품입니다. 확실히 대단한 발상이긴 합니다. 블레이드 러너 나왔을 때 쯤이고, 공각 기동대가 유명해지기 이전이며, 매트릭스는 나올려면 한참 멀었을 때 이니까요.

테마도 앞서갔지만 게임 내용도 시대를 앞서갔으며 이런 게임의 밸런스를 잡는 것은 리차드 가필드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매직 더 개더링 역시 리차드 가필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발전 시킨 것에 가깝습니다. 리차드 가필드가 초기에 이상한 밸런스 철학으로 만들어낸 전설의 사기 카드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 당시의 어떤 게임과도 유사하지 않았고, 게임은 비대칭 게임이라 밸런스 잡기도 어려웠습니다. 뭔가 대단하긴 한데 익숙하지 않고 밸런스도 좀 이상한 작품 정도로 당시 유저들에게 받아들여져 이 작품은 작가와 아쉬워하는 팬들을 뒤로 하고 3판 나올 때쯤 GG친 비운의 TCG로 남았습니다.  

오래 동안 저주받은 걸작으로 회자되던 작품이기에 누군가 재발매 좀 하면 안될까? 하는 생각은 그간 많은 이들의 망상 속에 있었는데 16년이 지나 2012년 결국 미국 오타쿠 보드게임 회사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에 의해 재창조되었으며 일러스트 등은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의 SF 게임 안드로이드 설정이 씌워졌습니다. 안드로이드가 복제 인간이나 인간형 로봇을 만드는 거대 회사들이 이권 다툼을 벌이고, 이들에 의해 값싼 노동력이 양산되며 하층민들이 일자리를 잃는 뭐 그런 사회상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 넷 러너와 잘 맞기도 합니다. 

게임은 뭔가 구린 비밀을 가진 거대 기업과 이를 노리는 해커의 대결입니다. 기업은 광고를 하고 광산을 개발하며 자금을 얻어서 비밀 프로젝트를 가동시키고 해커 침임에 대비한 방화벽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해커는 이를 무력화시킬 장비를 구축하고 목숨을 건 서버 침투를 감행합니다. 둘의 입장이 공격, 방어로 반대이며 둘의 플레이 방식도 다르고 득점 방법 또한 다른 비대칭 게임의 묘미가 있습니다. 밸런스는 장담할 수 없으므로 둘이 역할을 바꿔서 한번 더 해야 합니다. 

게임에서 가장 재미있는 점은 역시 테마입니다. 재미있는 아이디어와 세계관 이야기를 조금씩 담고 있는 카드를 읽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으며 카드와 카드 사이의 궁합과 상성이 있어서 연구 가치 또한 높습니다. TCG 게임은 서로 준비한 덱의 상성에 따라 승패가 거의 갈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 게임은 그런 면이 덜합니다. 

반면 게임 템포가 느리고, 게임의 결정적인 승부처가 운이라는 느낌을 주는데 이것은 코어 세트로는 해결이 안되는 부분입니다. 어찌 보면 바퀴벌레 포커를 아주 어렵게 한 기분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퀴벌레는 암울한 사이버 스페이스의 미래상을 이야기하며 즐길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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