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트 앤 매직 10: 레거시 (하)

격자 이동, 한번에 한칸씩 전진, 로그라이크 게임 비슷하게 우리가 1칸 이동할 때 적도 1칸 이동, 던전처럼 꼬불꼬불 오솔길로 이루어진 필드, 그야말로 구닥다리 플레이어를 위한 게임이었던 것입니다. 마이트 앤 매직 6부터 시작된 실시간 이동이 사라졌으며 맵도 넓지 않습니다.

마이트 앤 매직 6부터 플레이한 유저들은 이걸 퇴보라 부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후퇴하며 활 쏘는 6편 이후의 마이트 앤 매직이 저는 그저 그렇더라고요... 명령 한번 잘못 입력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이번 10편의 턴 방식 전투가 이상하게 마음에 듭니다..

레벨업 시 주어지는 스킬과 스탯 포인트를 어떻게 주냐에 따라 같은 캐릭터도 주력 스킬로 최고의 딜을 하는 캐릭터나 딜은 딸리지만 보조 힐러가 되는 캐릭터로 입맛따라 키울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스탯 이상하게 주는 게 누적되면 개망한다는 뜻도 됩니다. 스탯이나 스킬 포인트를 정말 찔끔찔끔 줍니다. 보통 엔딩 때의 레벨은 약 31 정도이고 경험치 늘려주는 NPC 데리고 극한까지 짜면 34정도 가능하며 나중에 나온 추가 DLC까지 다 하면 37-38 정도입니다.. 만렙이 50이던데 나머지 12레벨 분량의 DLC라도 추가하려는 음모인건지... 어쨌든 게임 초반에 레밸 30까지 캐릭터 기본을 빌드한다고 생각하고 스탯과 스킬 계획 세우는 게 좋습니다.

시리즈 전통대로 이 작품은 겁나 불친절합니다. 마을을 나가 몇 걸음 나간 꼬꼬마 필드에 극강의 몹이 있어서 모르고 갔다가는 끔살당하고, 스킬 포인트는 일정 점수를 쌓으면 이 대륙 어딘가에 있는 전문가에게 "님 전문가임을 인정함" 도장을 받아야만 이후에 스킬 포인트를 더 쌓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달인, 거장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고 발품을 팔아야 합니다.

전투는 더럽게 어렵습니다. 극초반에 만나는 몹들이 회피력이 높게 설정되어 공격이 빗나가기 일쑤이고 게임 시작 후 10분만에 만나는 보스가 땀나게 어렵습니다. 첫 보스전까지는 마을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 레벨 노가다도 불가능하고 돈도 없어서 장비를 갖출 수도 없는 상태에서 최악의 보스전을 펼쳐야 합니다. ㅜㅠ

그래도 어떻게든 극초반만 넘기면 게임은 몹시 할만해집니다. 지금 당장 격파 안되는 적은 레벨 높여서 다시 잡으러 가면 되고, 두 번째 마을과 세 번째 마을을 거치며 장비 수준이 좋아져서 이후에는 어렵지만 그냥 그냥 다 썰고 다닐 수 있습니다. 알고보니 맨 처음 보스가 가장 어려웠던 거였습니다. 헐.

이 게임은 몹이 리젠되지 않습니다. 또 드래곤 퀘스트처럼 게임 진행상 특정 이벤트를 거칠 때까지 못가게 막아 놓은 곳들이 많습니다. 현재 갈 수 있는 곳에서 현재 이길 수 있는 적들을 다 잡고 다니면 제작자들이 생각하는 적정 레벨에서 적정 수준의 적과 싸울 수 있습니다. 리젠되는 몹을 잡아서 과레벨업할 여지 따위 주지 않습니다.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아이템이 디아블로처럼 무작위로 떨어지는 것이 특징인데 던전과 몹을 공략하여 얻는 아이템으로 최강 장비를 갖추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구린 아이템이라도 꾸역꾸역 주워와서 팔아야 합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얻을 수 있는 돈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몹이 리젠되지 않으니까요. 모든 돈 모을 기회는 최대한 쥐어짜야 합니다.

던전 뒤지는 느낌 참 좋습니다. 문을 여는 순간 몹 1개 분대가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 많아서 문 열기 전마다 보호마법을 걸고 저장을 하고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여는 기분이 참 좋아요. 퍼즐 난이도는 적당하거나 쉬운 편이라 던전에서 적들 다 죽이고 "왜 이 문을 열 수 없을까?" 하며 헤매는 일은 없습니다.

던전에서 최강 장비를 찾는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상점에서 최강 장비가 나올 확률이 높고, 상점에서 세이브 로드 노가다로 파는 물건을 바꾸면 오히려 확정적인 최강 장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실은 게임을 날로 먹는 열쇠입니다. 그래도 전투가 쉽지는 않아요.

게임 시작 때 플레이어는 스승의 유골을 "카르달"이라는 도시의 성당에 가져가는 임무를 받는데 실은 저 카르달이라는 마을이 발더스 게이트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거기 가서 메인 퀘스트 몇개만 더하면 엔딩이에요. 카르달에서 최강 장비를 구한 뒤에는 최종 전 전에 캐릭터들을 키우기 위해 전 맵을 다 돌고 모든 적을 끔살시키며 경험치를 짜내야 합니다.

퀘스트, 보스전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30종류의 전설 아이템들이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상점에서 세이브 로드 노가다로 얻은 아이템들이 전설보다 성능이 월등히 좋다는 점 정도. 그렇다고 전설 아이템들 구하러 다니지 말아야 할까? 그건 아닙니다. 뽑을 수 있는 돈, 뽑을 수 있는 경험치를 모두 짜내려면 결국은 모든 장소와 모든 퀘스트를 다 한다는 생각으로 해야 해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도 플레이 타임은 30시간 정도로 절대 길지 않습니다. 익숙해지면 더욱 짧아져요. 여름 휴가 1주일 동안 엔딩 3번 가능.

서브 퀘스트가 많긴 하지만 진행은 일본식 RPG 생각나는 선형적인 구도이고, 퀘스트와 던전은 캐릭터를 성장시키고 증대된 전투력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며 게임 내 오브젝트와의 상호작용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던전에서는 발판을 밟거나 비밀문을 찾거나 벽에 붙어 있는 레버를 당기는 정도의 행동을 할 수 있고, 필드에서는 땅에 뭔가가 묻혀 있다고 표시가 나는 장소를 파볼 수 있습니다. (애초에 땅 파는 명령이 이런 장소에서만 생겨요.) 고전의 향기가 물씬 풍깁니다만 울티마를 기대하는 분에게는 매우 별로이겠습니다. (울티마 원리주의자에게 무슨 RPG인들 감흥이 있겠어요 ㅜㅠ)

어쨌든 간만에 느껴보는 두근두근 체험이었습니다. 엔딩까지 우리의 영웅들은 적을 4:1로 싸울 수 있는 후미진 곳으로 유인해서 각개격파하는 수법으로 눈물나게 싸우지만 캐릭터의 레벨빨과 플레이어의 경험으로 점점 할만해집니다. 레벨 노가다가 불가능한 환경 덕분에 플레이어는 파티의 모든 기능과 잠재력을 끌어내는 노하우를 빨리 습득하게 됩니다. 간만에 느껴보는 모험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일단은 2014년에 플레이한 디지털 게임 가운데 단연 최고였고 잊었던 재미를 찾게해준 괜찮은 작품입니다. 구닥다리 스타일의 힘은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년에 신 세계수의 미궁 쩔면서 하던 기분이 새록새록... 2014년 7월 현재 본 블로그 상단은 본 게임 이미지가 딱하니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말 잼나게 했고, 유사한 게임 몇개(위저드리나 레전드 오브 그림락)를 지르고픈 욕망이 솓구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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